목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

모세의 놋뱀
by 전재훈2024-04-22

성경에 뱀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와를 꼬드겨 선악과를 따 먹게 한 짐승이 뱀이고,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자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물게 하셨고,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날랜 뱀,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사 27:1)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교훈 속에서도 지혜를 상징할 때 뱀이 나오기도 하지요. 


뱀은 12간지 60갑자를 논할 때도 나옵니다. 12지는 자(쥐), 축(소), 인(호랑이), 묘(토끼), 진(용), 사(뱀), 오(말), 미(양), 신(원숭이), 유(닭), 술(개), 해(돼지)입니다. 이 중에 뱀은 여섯 번째에 등장하지요. 뱀이란 짐승은 겨울에 땅 밑에서 겨울잠을 자고, 성장하면서 허물을 벗기도 하는데요. 이런 뱀의 특징을 보고 무속신앙에서 뱀은 부활의 상징이고 치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뱀이 치료의 상징으로도 쓰이고, 전령의 상징으로도 등장합니다. 의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는 자기 딸들에게 몸 단장할 때 뱀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군의 의무병들은 지팡이에 한 마리 뱀이 감겨있는 상징을 사용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 뱀이 전령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뱀이 땅 아래와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신과 인간의 사이, 혹은 생명과 죽음의 사이를 왕래하는 것으로 여겨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상징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지요. 헤르메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두 마리가 휘감겨 올라가는 모습이고, 좀 더 빨리 다니라고, 지팡이 끝에 날개를 달아놓았지요.


그런데 미군 의무병은 영국군 의무병이 쓰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착각을 하는 바람에 자신들 상징으로 뱀 두 마리가 달려 있는 헤르메스의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영국보다 미국이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이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누르고 전 세계 의술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한국에 와서는 뜬금없이 그 출처가 모세의 놋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올렸는데 이것을 본 백성들이 살아났다고 해서, 마치 놋뱀이 불뱀병을 치료한 것인 양 여겨진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더니 모세의 놋뱀을 알고 앰뷸런스 마크를 딱 보는 순간 그냥 확신해 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구슬을 잘못 끼웠지요. 이스라엘에서도 모세의 놋뱀을 분향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히스기야 시대에 부숴버리고 느후스단(놋조각)이라고 명명했지요. 놋뱀은 그냥 놋 조각에 불과한 것이지 특별한 신통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놋뱀이 한국에서 상징으로 부활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뱀은 4단계로 진화를 합니다. 그냥 뱀이 커서 구렁이가 되고, 구렁이가 이무기로 자랐다가, 여의주를 입에 무는 순간 용으로 변신하지요. 이런 탓에 뱀은 신성시되기가 쉬웠고, 팔레스타인에서도 하늘을 나는 뱀의 신화 비슷한 것이 있었던 탓에 놋뱀이 마치 그런 하늘을 나는 용 취급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뱀은 정력에 참 좋은 짐승이라고들 하지요.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선악과 대신 뱀을 먹었을 거라는 농담이 있던데, 그만큼 한국에서는 뱀이 살기 참 퍽퍽한 곳입니다. 뱀의 허물도 한국에서는 귀한 약재로 쓰인다고 하니, 뱀이 치유의 상징이 되는 것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친숙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땅을 지나갈 때 우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에돔 땅에서 맛있는 음식을 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졌던 것이지요. 그들은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뱀들을 보내어 물게 하셨지요. 그들은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민 21:7)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놋뱀을 만들게 하셨고 그 놋뱀을 보는 자마다 다 살게 하셨습니다. (보는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장애인도, 고열에 시달려 누워있는 자도 다 살리셨을 테니까요. 그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불뱀이 물러가게 해 달라는 거였지요. 이런 기도는 기도하는 순간조차 불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뱀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시는 방법으로 놋뱀을 사용하셨습니다. 에돔 땅의 음식에 빼앗긴 시선을 다시 하늘로 돌리시는 사건이 바로 놋뱀 사건이었지요.


예수님은 이 놋뱀 사건을 비유로 들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요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요 3:16)라고 하셨지요. 병 주고 약 주는 것처럼 불뱀 주고 놋뱀 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광야 길을 가게 하시려는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나중에는 그 불뱀에 물려 죽어야 할 우리를 대신해 친히 그 불뱀에 물려 죽을 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게 하심으로 그 사랑의 크기가 어떠했을지 보여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줄 것을 바라보며 놋뱀을 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헤아리기 힘든 엄청나게 큰 사랑이었습니다. 


놋뱀이 앰블런스의 상징이 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모세의 놋뱀으로 대체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바뀌기 전까지는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모세의 놋뱀은 구분되어야 하고, 놋뱀마저도 치료의 힘이 아니라 사랑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전재훈

전재훈 목사는 서울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발안예향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오히려 위로팀 켈러를 읽는 중입니다(공저)가 있다.